두 사람이 있었다. 같은 기업, 같은 작업장에서 일했다. 투쟁의 자리마다 함께 했다. 함께 어깨 걸었고, 함께 소리 질렀다. 함께 눈을 맞았고, 함께 주먹을 뻗었다. 한 사람은 정규직, 다른 한 사람은 비정규직. 같은 노동자면서도 다른 노동자. 그래도 그들은 동지란 이름으로 함께 싸웠다.
시간이 흘렀다. ‘정규직 그’는 원청노조 위원장이 됐고, ‘비정규직 그’는 변함없이 하청노동자였다. ‘정규직 그’가 이끄는 노조를 현장에선 어용이라 불렀고, ‘비정규직 그’가 소속된 노조는 회사가 인정하지 않았다. 둘 사이엔 어느덧 깊은 강이 흘렀다.
‘정규직 그’가 잘 나가던 어느 날, ‘비정규직 그’는 자기 몸에 불을 질렀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한 마디 말만 남겼다. 새까맣게 탄 ‘비정규직 그’를 두고 ‘정규직 그’가 말했다. “분신했다고 다 열사가 되는가?” 순간 ‘정규직 그’는 두 가지 이름을 버렸다. ‘민주노조’란 이름과, ‘동지’란 이름. 수많은 목숨이 피 흘리며 지켜 온 이름, 그 먹먹한 이름을.
(매일노동뉴스 기사 중에서)
“배달호열사 투쟁 당시만 해도 두 사람은 아주 절친한 사이였다. 박일수 열사가 정규직 노동자 중에 가장 친했던 사람이 탁학수였다. 현중에서 같은 작업분과에서 일했다. 두 사람은 많은 것들을 같이 이야기하고 고민했던 사이였다. 심지어 분신을 마음먹었을 때 탁학수한테 가서 ‘내가 죽어야겠다, 죽지 않고서는 해결될 수 없다’는 맘을 털어놨을 정도였다. 그랬던 두 사람이었는데, 1년 뒤 한 사람은 활동가에서 어용노조 위원장으로 돌아섰고, 한 사람은 분신자살했다. 당시 현장활동가 신분으로 배달호열사 투쟁에 같이 참석했던 탁학수는 2003년 말 선거를 앞두고 현장활동을 다 끊고 회사쪽으로 돌아섰다. 이 순간부터 탁학수는 비정규노조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았고, 표현도 늘 ‘하도급노조’란 말을 썼다. 현중과는 상관없는, 현중이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노조라는 뜻이다. 아주 아이러니컬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하청노동자들의 가장 큰 설움은 같은 ‘노동자’란 이름 아래, 같은 현장에서 일해 온 동료 정규직 노동자들의 태도였다. 박일수 열사 분신대책위의 활동을 “선거에서 정몽준 의원에 위해를 가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 때문”이라며 현중노조 조합원이 의구심 어린 시선을 보내는가 하면, 노조 대의원들은 대책위 농성장으로 대거 몰려와 천막을 부수고, 플래카드를 뜯고, ‘비정규직 철폐하라’는 글귀가 쓰인 만장을 압수한다. 이들 중 한 명이 각목으로 난동을 부리기까지 했다.
결국, 2004년 9월 15일 금속산업연맹 임시대의원대회에서 탁학수씨가 위원장으로 있던 현대중공업노조를 ‘제명’하였다. 한 공장에서 함께 투쟁하였던 동지였으나 끝내 정규직 비정규직이라는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투쟁의 동지를 저버린 탁학수 집행부는 민주노조의 자격을 이미 상실하였다.
현대중공업노조 탁학수 집행부는 현장에서 비정규직 투쟁을 함께 하지 않음으로써 결과적으로 자본의 이해를 정확하게 대변하는 노동조합이 되었으며 민주노조운동의 기풍을 훼손하고 수 많은 비정규직노동자들의 희망을 단숨에 걷어차 버렸다.
(울산 현장 활동가)
▼ 박일수열사 투쟁 일지▼
▪ 2004. 2. 14. 새벽 현대중공업 사내하청노동자 박일수 열사 ‘비정규직 차별철폐’ 요구 유서 남기고 분신 자결함.
▪ 2004. 2. 15. 현대중공업노조(위원장 탁학수) 기자회견을 통해 “분신대책위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밝힘.
▪ 2004. 2. 16. 16일 오후 7시30분께, 고 박일수 열사의 유일한 유족인 딸 박아무개씨를 현대중공업노조의 간부가 납치해 달아나려 한 사건이 발생함.
▪ 2004. 2. 17. 새벽 6시, 현중사내하청노조 조합원 2명 크레인 점거 후 용역경비에 의해 진압됨.
▪ 2004. 2. 21 현대중공업 앞에서 "비정규직 철폐! 노동탄압 분쇄! 고 박일수 열사 정신계승 투쟁결의대회" 개최.
▪ 2004. 2. 25. 현중노조 대의원 70여명 조문을 요구하며 고 박일수 열사 시신이 안치된 울산대병원 영안실에 강제로 들어와 "박일수 열사 대책위" 소속 사람들과 실랑이를 벌임. 26일 오후에는 몸싸움까지 벌이는 사태 발생. 이 과정에서 현중사내하청노조 조합원이 머리를 다쳐 응급실로 이송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