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년 공황의 피맺힌 교훈
97년 11월 21일 우리는 IMF외환위기라고 말하는 경제공황을 맞았다. 경제공황은 사회 전체를 참혹하게 뒤흔들어 놓았다. 그리고 정확히 10년이 지났다. 당시 경제공황이 가져온 상처가 아직 회복되지 않았는데 우리는 또 다시 공황의 도래에 대해 말하고 있다. 정확하게 공황의 발발이 언제일지 예언할 수는 없지만 전 세계경제가 대단히 불안정하다는 것, 자본주의 위기가 심화되고 있다는 징조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중국발, 미국발 세계 대공황의 징조!’와 ‘자본주의 공황, 사상과 혁명의 문제!’라는 기사에서 공황에 대해 다뤘다. 우리는 두 기사에서 공황이 임박해 있으며, 그 공황의 양상은 전 세계적이고 파국적일 것이라는 것, 공황은 단순히 경제법칙을 넘어서 노동자와 자본가가 목숨을 내걸고 싸우는 계급투쟁의 문제임을 밝혔다.
이러한 주장은 단순한 분석과 예측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97년 경제공황의 피 맺힌 결과가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특히 남한 노동자 계급은 97년 경제공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자본의 물리적 공격에 초토화 됐고, 사상적으로도 비무장 상태로 나섰다가 자본의 이데올로기에 일방적으로 당했다. 97년 경제공황은 우리에게 철저하게 반면교사가 되어야 한다. 97년 경제공황의 결과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
공황이 가져온 참상
97년 경제공황이 가져온 결과는 그야말로 파국적이었다. 97년 경제공황은 현상적으로는 달러의 유출과 함께 시작되었다. 남한 정부는 국가부도 사태에 직면해서 11월 21일에 IMF(국제통화기금)에 특별구제금융을 요청해서 12월 3일에 승인을 받았다. 그래서 97년 경제공황 시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 것을 이유로 IMF외환위기라고 한다. 그러나 97년 경제공황의 촉발 이전부터 남한 자본주의의 위기는 깊어지고 있었다. 이미 부채비율이 높은 재벌들이 97년 1월부터 한보철강을 시발로 해서 삼미특수강, 진로, 대농, 한신공영, 기아, 쌍방울, 해태, 뉴코아가 연속적으로 부도났다. 재벌은 절대 망하지 않는다는 대마불사라는 신화가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재벌들은 과잉투자를 통해서 막대한 생산물을 시장에 쏟아냈다. 이러한 과잉투자는 자기자본이 아닌 국내외 금융기관으로부터 조달한 막대한 부채로 가능했다. 일부 재벌들은 자기 자본의 10배가 넘는 부채를 떠안고 있었다. 이러한 과잉투자는 과잉생산을 낳는다. 과잉생산 된 생산물이 판매되지 않아서 막대한 부채를 갚을 길 없는 수많은 기업들이 부도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기업의 부도가 늘어나고 위기가 깊어지자 금융기관은 막대한 부채를 돌려받지 못했고 은행의 파산도 늘어났다. 덩달아 파산의 위기에 직면한 은행들은 기업 대(출)을 억제하면서 더 많은 기업들이 파산했다. 기업위기가 금융기관의 위기를 부르고 금융기관의 위기가 기업의 위기를 심화시키는 악순환이 맞물려서 진행됐다.
이미 80년대 초에 시작된 금융 자유화는 90년대 중반에 거의 완성됐다. 이러한 자본 자유화를 통해서 해외 자본은 더욱 더 자유롭게 국내 시장에 들어왔다가 나갈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됐다. 단기성 투기 자금도 국내에 더 많이 유입돼 있었다. 금융 자유화로 국내에 유입돼 있던 해외자본은 남한 자본주의의 위기 상황 속에서 급격하게 이탈하기 시작했다. 달러를 가진 해외자본이 한 순간에 국내은행으로부터 자본을 회수했다. 해외자본이 국내은행에 한꺼번에 자금회수를 요구하자 국내은행은 한국은행에 구제금융을 요구했다. 한국은행은 보유한 외환을 국내금융기관의 긴급 자금으로 쏟아 부었다. 이로써 외환보유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외환위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해외자본의 급격한 이탈은 97년 공황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였고, 97년 공황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달러가 급격하게 빠져 나가고 보유한 외환이 떨어지자 실질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는 금의 가치가 급등했다. 이제는 금만이 빠져나간 달러를 빠르게 되살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남한 자본가 국가는 자신의 위기를 국민운동으로 수습하려 했다. 애국주의 열풍과 더불어 금모으기 운동이 전 국민적으로 펼쳐졌다. TV는 연일 금모으기 운동 특별 방송을 방영했다. 자본가 언론은 금모으기 운동이 제2의 ‘국채보상 운동’이라고 찬사를 늘어놓았다. 장롱 깊숙이 박아 두었던 돌반지와 결혼반지를 헌납하려는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은행에 금을 맡기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은행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이러한 애국주의 운동은 자본주의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을 은폐하고 책임을 전가하는 데는 효과적이었지만 이것으로 위기가 절대로 극복될 수는 없었다. 97년 경제공황의 결과는 심각한 것이었다. 남한 경제는 4.7% 성장에서 -6.9%로 후퇴했다. 당시 30대 계열사의 절반 이상인 17개 기업이 부도가 나서 사라졌다. 98년 한해 2만 2828개 기업이 부도가 나서 사라졌다. 97년 1만2천 달러가 넘던 1인당 국민소득은 1년 만에 절반수준인 7,300달러로 뚝 떨어졌다.
노동자 계급이 당하는 고통은 더욱 더 참혹했다. IMF는 구제기금의 대가로 긴축재정과 고금리를 강요하고 기업 구조조정과 노동력 유연화 정책을 요구했다. 이러한 조치는 자본의 과잉투자를 막고 자본의 이윤율을 높여서 자본의 위기를 탈출하게 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됐다. IMF는 한국의 공황이 전 세계적으로 여파가 미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한국이 위기를 하루 빨리 탈출하여 외채를 고스란히 갚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IMF의 의도는 국내 자본의 이해관계와도 맞아 떨어졌다. 그러나 IMF의 고금리 정책으로 더욱 더 늘어난 금융 빚을 떠안게 된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했다.
경제공황의 가장 직접적인 결과는 바로 실업이었다. 97년 7월 47만 6천명이던 실업자는 1년 뒤에는 1백 65만 1천명으로 100만 명 이상이 늘어났다. 그러나 이러한 공식 실업률은 실제 실업의 양상을 은폐하고 있었다. 통계작성 기간 동안에 일거리를 찾아 헤매다가 일거리 찾기를 중단한 실망실업자, 가족 무급 종사자, 일용직, 임시직 등 불완전 취업자를 다 합하면 실질적인 실업자가 457만 명에 달한다는 통계(이은숙, 「‘노동시간단축과 생활임금보장’ 투쟁의 현재적 의의」)도 있다. 이 통계에 의하면 실업률이 19%에 달한다. 직장을 잃고 어쩔 수 없이 가정으로 돌아간 여성, 취업 대신에 결혼을 선택한 여성, 취업을 할 수 없어 대학원 진학을 한 학생 등 실망실업자 수는 사실상 정확하게 통계로 작성할 수 없기 때문에 실질적인 실업자는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
특히 기능직 노동자들은 97년 12월 315만 8천명에서 6개월 사이에 68만 명 정도가 줄어든 248만3천명으로 21.3%가 일자리를 잃었다. 판매서비스 노동자들의 경우에는 98년 상반기에만 30만 명이 줄어들었다.(신광영, ‘한국의 계급과 불평등’) 금융권에서는 은행의 합병과 대은행의 탄생 과정에서 가해지는 구조조정으로 15만 명의 금융 노동자들이 정리해고 당했다. 최근에 이러한 정리해고로 쫓겨났던 금융권 노동자들의 참혹한 삶을 그리는 방송이 보도되고 있다. 이들은 주유소 알바, 김밥 집, 노가다 판을 전전했다.
경제공황의 결과로 자살자가 속출하고 가정은 파괴됐다. 정신병과 화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정직하게 열심히 일했는데 하루아침에 배신을 당하고 쫓겨난 자의 심정은 억울함, 배신감, 분노, 절망감이 뒤엉키게 된다.
“아직도 꿈을 자주 꿉니다. 꿈속에서 작업복을 입으려 하는데 아무리해도 입어지지 않아요.”(대우자동차 정리해고철폐 투쟁백서 ‘공장으로 돌아가자’)
2000년 대우그룹의 부도 여파로 2002년 정리해고 당한 대우자동차 정리해고자의 서글픈 이야기다. 정리해고자의 생활의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럽다.
“생활요? 두말하면 잔소리죠, 노가다도 뛰고 붕어빵 장사도 하며 간신히 버텨가고 있죠.”(같은 책)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은 정리해고 통보와 함께 사택에서 강제퇴거를 강요당했다. 현장에서 정리해고 당하지 않은 조합원들은 동료의 정리해고에 대한 죄책감과 자신은 살아남았다는 안도감, 언제 또 잘릴지 모르는 불안감이 뒤섞여서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살았다.
그나마 노동조합이 있는 대공장 노동자들의 정리해고는 사회적으로 알려져서 참상의 일부가 드러났다. 노동조합으로 뭉쳐 원직복직 투쟁을 전개할 수도 있었다. 소리도 없이 공장에서, 직장에서 쫓겨나와 거리를 헤매고 다녀야 했던 수백만 노동자들의 삶과 고통, 굶주림은 아무도 보상해주지 않는다. 아무도 알아주지도 않는다. 이 중에는 절망하고 체념한 자들, 노숙자로 전락하여 얼어 죽고, 굶어죽는 사람이 부지기수로 많았다.
97년 경제공황의 가공할 만한 참상으로 인해 삶의 질은 20여 년 전으로 후퇴했다. 공황의 여파는 이후 수년 동안 대대적인 정리해고로 계속 이어졌다. 운 좋게 살아남은 노동자들은 자본의 통제 하에 숨죽이고 살았다. 자본은 노동조건 후퇴, 노동강도 강화, 임금동결도 다 받아들이도록 압박을 가했다. 자본은 길거리에 넘쳐나는 실업자들의 상태를 근거로 강압적으로 이러한 요구를 관철시킬 수 있었다. 자본은 98년 사회적 조건을 악용해서 정리해고제, 근로자파견제의 도입과 더불어 비정규직을 대대적으로 확대시켰다. 그런데도 자본은 비정규직으로의 취업이 자발적인 선택이었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 97년 경제공황 이전에 500만이 되지 않던 비정규직은 지금은 800만 명을 넘어서고 있다. 경제공황 당시 285조원이던 가계부채는 지난 3분기 말 750조원으로 늘어났다. 가구당 4500만원으로 빚이 늘어났다.
공황은 근본적으로 과잉생산과 수요의 부족에 원인이 있다. 무정부적인 자본 간의 경쟁으로 인해 과잉생산은 기하급수적인데 수요는 산술적으로 늘어난다. 97년 경제공황의 결과로 이윤을 높이기 위한 자본의 공세로 수요는 극심하게 줄어들었다. 총자본은 실질적인 소득의 증대 없이 대중들의 수요가 늘어날 수 있도록 했다. 금융자본은 97년 내수 시장 활성화라는 명목으로 무분별하게 신용카드를 발급했다. 정부는 카드 발급 기준과 현금 서비스 한도를 폐지했다. IMF의 고금리 정책과 더불어 98년 이자제한법 폐지로 고금리 정책이 실시됐다.
실질소득이 늘어나지 않는 가운데 미래의 소득을 예상해서 빚으로 소비를 하는 부채경제가 지속되면 새로운 위기가 발생하게 된다. 이것이 2003년 금융업체와 개인 파산자가 급증하는 카드대란으로 나타났다. 2007년에는 급기야 신용불량자가 700만 명에 달하고 있다. 결국 실질적인 소득 상승 없이 부채로 유지되고 늘어나는 소비는 또 다른 과잉생산과 수요의 부족이라는 새로운 모순을 만들어낸다. 미국에서는 이것이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 현실화 되고 있는 것이다. 남한에서도 최근 주택담보 대(출) 이자가 급등하면서 개인과 금융자본이 연쇄 파산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공황이 우리 사회 전체에 파국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말은 절반만 진실이다. 오히려 자본간 경쟁에서 살아남은 자본은 합병으로 거대하게 몸짓을 늘렸다. 33개 은행 중 5개 은행이 퇴출되고 11개 은행이 합병되어 10년 만에 열여덟개로 줄어들었다. 경제공황으로부터 10년 동안 퇴출 및 인수합병으로 인해 97년 기준으로 전체 금융기관의 43.6%인 916개의 부실 금융기관이 정리됐다. 이러한 금융기관의 퇴출과 거대은행으로의 집중으로 인해 “1997년 말에는 자산규모 세계 100위권에 드는 국내은행이 전혀 없었으나, 2006년 말 현재 국민, 우리금융, 신한금융, 하나금융 4개사가 포함”되고 “2007년 현재 포천 글로벌 500대 기업에 한국기업이 14개가 등재”(삼성경제연구소, ‘외환위기 10년의 평가와 과제’)되었다.
전체 사회의 파국과 노동자 민중의 참상을 밟고 살아남은 자본은 엄청난 부와 사치와 향락을 즐기고 있다. 자본은 노동자 계급에 대한 착취를 높이는 한편으로 비생산적인 투기열풍에 빠져들었다. 이로 인해 상위 5%가 전체 불로소득 82%를 차지하고 있다. 기생적인 자본가 계급의 불로소득이 3천조가 증가했는데 나머지 95%는 한 푼도 늘어나지 않았다. 부동산 가격 상승으로 늘어난 자산이 500조인데 대한민국 모든 노동자의 연간 소득은 350조에 불과하다. 자본가 계급에게는 부가 집중되고 노동자민중에게는 빈곤이 집중되는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는 것이 97년 경제공황의 진정한 결과들이다.
사상의 빈곤과 공황의 교훈
97년 경제공황은 노동운동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1998년부터 1996년까지 524건이던 파업발생 건수는 97년부터 2006년까지 242건으로 절반 이상 감소했다. 같은 기간에 파업으로 인한 노동손실일수는 2,790.7에서 1,236.3으로 줄어들었다.(한국노동연구원 「국내노동통계」)
노동운동 진영은 경제공황의 파국적인 결과에 사상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97년 경제공황에 대해 맑스주의 공황론 대신에 IMF음모론, 재벌체제의 모순 같은 비과학적 사상이 판 쳤다. 이러한 입장은 반미주의적 경향과 시민사회 단체의 재벌해체, 재벌개혁론으로 나타났다. 자동차 4사 투쟁에서는 해외매각 반대라는 민족주의적 경향의 투쟁과 공기업화 반대 투쟁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잘못된 기조는 자본의 국적을 둘러싼 반대와 국내자본과의 협조주의로 나타나고, 자본의 소유 형태를 둘러싼 투쟁으로 나타났다. 공기업화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노동자의 양보가 대안으로 제시되기도 했다. 고용과 생존권을 중심에 두는 투쟁 대신에 현장 바깥에서의 시민단체와의 결합을 통한 여론 중심의 투쟁으로 변질되기도 했다.
실질임금 삭감 없는, 노동조건 후퇴 없는 노동시간 단축 요구는 외면당했다. 대신에 노동자들이 임금인상을 억제하고 노동시간을 단축하는 일자리 나누기가 대안으로 제출되었다. 이러한 요구는 자본진영에서도 주장하는 노사상생의 논리와 맞아떨어졌다. 결국 이러한 잘못된 요구와 현장투쟁력을 조직하지 못한 결과, 수년째 끌어오던 노동시간 단축 투쟁은 노동법 개악으로 연결됐다.
반면에 96년 말 97년 초 총파업 투쟁의 패배 이후에 자본의 공격은 철저했다. 자본은 위기가 심화되는 97년에 무교섭, 무파업, 무쟁의를 강요했다. 총파업 투쟁의 패배감에 젖어 현장은 자본의 공세에 무기력하게 대응하면서 철저하게 유린당했다.
민주노동당의 전신인 ‘국민승리 21’은 ‘일어나라 코리아’라는 공황으로 노동자 계급이 초토화된 상황에서 다분히 애국주의적, 국가주의적인 슬로건으로 대선에 임했다. ‘국민승리 21’이라는 명칭에서부터 이러한 기조가 물씬 풍겨나고 있다.
남한의 노동운동은 전반적으로 호황기 노동운동의 전략과 전술에 익숙해져 있었다. 실업자 운동은 거의 조직되지 못했다. 몇몇 단체에서 노숙자를 대상으로 하는 실업자 조직화 노력을 했지만 허사였다. 삶의 희망 포기, 절망적 상태, 체념, 사회적 모순의 희생자들인데도 철저하게 개인의 탓으로 돌려버렸기 때문이다.
호황기 동안에는 자본의 지불능력에 기초해서 임금인상을 하라는 요구나 연말의 성과분배 투쟁이 중심이 되었다. 97년 경제공황이 닥치면서는 부도사업장이 속출하고, 공장 가동률이 떨어지면서 자본의 지불능력이 떨어졌다. 자본은 자신의 위기를 정리해고, 임금삭감, 단협후퇴 등 노동자계급에 대한 공격으로 극복하려 했다. 자본은 철저하게 자신의 길을 간 반면에 노동운동은 갈 길을 잃고 헤맸다.
97년 6월 기아자동차가 부도 위기에 직면해서 기아자동차 이재승 집행부는 기아 살리기 운동을 펼치면서 회사에 임금을 무교섭 위임하였고, 이후 7월 9일까지 기아그룹 전체 계열사 노조가 그 뒤를 이었다. 아시아자동차(현재 기아자동차 광주공장)노조는 회사 살리기 성금 4억 5천만 원을 사측에 전달하고 자본과 합작으로 회사 살리기 파업에 돌입하려고 하기조차 했다. 이러한 가운데 무급 순환휴무제, 희망퇴직제, 단협 양보, 복지후퇴로 자본에 일방적으로 양보조치를 했다.
기아만이 아니라 전체 자본은 회사의 위기를 이유로 고용불안을 조성하면서 노동자의 일방적인 양보를 요구했다. 이에 대해 노동운동 진영 내에서는 고용을 대가로 해서 임금과 단협을 후퇴시키고, 노동조건을 악화시키는 양보교섭이 판쳤다. 당시 금속산업연맹 200개 중 절반의 사업장에서 고용안정협약서를 체결했다. 그러나 대부분 사업장에서 노동자의 일방적인 양보로 체결된 고용안정협약서는 파기됐다.
98년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반대 투쟁 당시에도 양보교섭이 판쳤다. 전직 위원장 출신 중 한사람인 이상범은 ‘현대자동차 고용문제 토론회’에서 ‘노동조합에서 검토할 수 있는 양보교섭 카드의 몇 가지 단계’를 제시하며 노골적으로 양보교섭을 부추겼다. 이 발제문에는 생산성 향상 운동, 잔업특근 통제, 전환배치, 무급휴가 확대, 임금보전을 요구하지 않는 작업시간 단축, 희망퇴직제 실시, 후생복리비 한시적 동결, 성과금 양보, 상여금 일부 지급 유예, 총액임금 동결 등 반노동자적인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러한 대대적인 양보안은 당시 김광식 집행부에게 상당부분 받아들여졌다.
현대자동차 자본은 97년 말에 하청 노동자 1,800여명을 우선 정리해고 하고, 과장급 이상 800여명 명예퇴직, 다섯 차례의 희망퇴직으로 8천여 명의 노동자를 희망퇴직이라는 이름으로 내쫓고도 277명을 정리해고 했다. 1,261명에게는 무급휴직을 실시했다. 3차 희망퇴직 동의와 더불어 정리해고를 철회한다면 2,500억 원 임금삭감, 노사평화선언을 하겠다는 노조의 양보안에도 불구하고 자본은 아무 것도 양보하지 않고 일방통행으로 공세를 감행했다.
하청 노동자를 안전판으로 하여 정규직의 고용을 보장받겠다는 2000년 정갑득 집행부의 반동적인 완전고용합의서는 양보교섭의 일환으로 체결됐다.
“하청화는 98년도의 대규모 고용조정을 경험한 바에 따라 그 완충지대를 두어 직영조합원들의 완전고용을 보장받겠다는 취지이다. 구조조정 경험 3대 원칙은 경기가 불안정한 상태에서 일정한 하청을 투입하여 완충지대를 두어 대비하자는 것이 취지이다.”(현자노조신문 2000-13-31호)
이 완전고용합의서에는 여유인력 발생 시 비정규직의 일자리에 정규직을 재배치하는 것, 야간조 순환 휴가, 명예퇴직 실시, 16.9%의 하청 투입 비율 유지 등 정규직의 일방적 양보와 회사 위기 시에 투입된 하청 노동자들을 우선 정리해고 한다는 반노동자적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면서도 노조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하청인원을 투입해야 경기가 불안해도 정리해고가 없을까? 여기에는 아무런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라고 스스로 무력감을 고백하고 있다. 결국 이러한 완전고용합의서는 자본에 대한 노조의 백기항복이자 구조조정 동의서에 불과하다.
2000년 11월 8일 대우차가 최종 부도 처리 된 이후에도 정권과 자본은 인력 감축에 대한 노조의 동의서를 집요하게 요구했다. 노조는 이 구조조정 동의서를 끈질기게 거부했으나 노조의 부도책임론과 부도난 회사의 최종 파산압박, 어용들의 공세에 밀려 11월 27일 ‘대우자동차 (경영혁신)을 위한 노사 합의서’를 체결하게 되었다. 그런데도 노조 내 어용들과 한국노동사회연구소에서는 "노조가 동의서를 제 때 쓰지 않아서 부도가 났다”며 부도 책임을 노조에 뒤집어 씌었다. 대우차노조는 전직 위원장단과 현장 제조직 의장단의 압박 속에서 2001년 2월 16일 정리해고가 임박한 시점에서 희망퇴직을 수용한다는 최종안을 제출했다. 그러나 노조의 이러한 최종안에도 불구하고 같은 날 곧바로 1754명의 정리해고가 자행되었고 이에 맞서는 수년 동안의 처절한 투쟁이 전개되었다.
결국 모든 정리해고의 경험을 통해 노동자의 어떠한 양보도 그것이 결코 대안이 아니라는 게 명확해졌다. 자본은 철저하게 노동자의 고통전담을 요구하면서 자신들은 어떠한 양보도 없이 정리해고를 자행했다. 심지어 대우자동차 사례에서 보듯 부도가 노동자의 책임이라는 파렴치한 이데올로기 공세도 자행했다.
남한 자본주의의 경제공황과 노동조합의 패배는 조합원들의 집단적 단결의식을 약화시키고 개인주의, 이기주의가 팽배해지도록 했다. 회사가 잘 나갈 때 잔업특근으로 벌어두자는 조합원들의 욕구가 강해졌다. 기아자동차 비정규직 투쟁에 대한 구사대의 난동과 정규직 조합원들의 침묵은 기아의 유동성 위기설과 더불어 고용불안에 휩싸인 노동자들의 현재 상태를 잘 보여준다.
자본은 경제공황 이후에 노사정 사회적 합의주의를 적극적으로 유포해 왔다. 김대중 정권은 98년 사회적 합의기구인 노사정위원회를 통해 정리해고와 근로자파견제를 관철시켰다. 개량주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하여 자본과 정권의 들러리를 자처했다. 이후 10년 동안 자본과 정권의 사회적 합의주의 공세에 대해 노동운동 진영은 여전히 참여와 탈퇴를 반복하면서 자본의 공세에 협조하고 있다.
양보교섭, 비정규직과의 계급적 단결 거부, 사회적 합의주의 등은 97년 경제공황이 낳은 사상적 빈곤의 결과물들이다. 공황기 자본의 공세 앞에서 노동운동의 올바른 전략과 전술은 자본주의에 대한 과학적 인식과 혁명적 사상의 정립 없이는 세워질 수 없다.
노동자 계급을 공격하지 않으면 자신의 모순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자본주의는 얼마나 폭력적이고 무능력한가? 대중들의 삶이 도탄에 빠져 있는데 대선에서 보여주는 자본가 정치인들의 비열한 사기와 역겨운 거짓말을 보라! 지금까지의 공황이 자본이 노동자 계급을 공격하여 위기를 돌파하는 기회였다면 임박한 공황은 노동자 계급이 자본의 위기를 통해 혁명적으로 단결하고, 노동자 계급의 새 세상을 열어 제치는 지렛대로 삼아야 한다. 이것이 97년 경제공황의 파국을 온몸으로 감내하며 버텨왔던 노동자 계급이 취해야할 진정한 ‘공황의 교훈’이다.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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